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만나다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만나다
  • 글로벌뉴스충청 문수협 기자
  • 승인 2021.06.2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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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을 사랑한 시골소년, 그 이야기를 들어 본다

글로벌뉴스충청 취재진은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만나 국악을 하게된 동기와 전통예술공연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 국악사랑에 대한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대금과의 운명적 만남

전라남도 여수의 시골 마을 여선생님 자취방에서 본 베토벤 석고 두상은 향후 인생에 대한 암시를 하는 듯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 학년에 30명 남짓의 한 반밖에 없는 전교생 300여명의 아주 작은 초등학교로 첫 부임한 여선생님의 한숨은 시골 어린이들에게 연극과 리코더를 가르치는 재미로 변하였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 아래로 고요하게 출렁거리는 밤바다 앞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리코더 합주단의 연습은 각종 대회에서 상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된 뒤 낯설음을 적응하는데 리코더가 제격이었다. 쉬는 시간 교실 한편에서 시작된 리코더 연주는 장기자랑 때마다 단골로 불려 졌고 그 인기는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당시 진로는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음악선생님이 국립국악고등학교 진학을 권해주었다. 국악이라는 거부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일반 인문계고등학교 보다는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즐겁게 청춘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국립으로 학비도 없고, 매월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매력적이었지만 막상 겨우 100명밖에 선발 안 한다는 것을 아니 더욱 가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는 학력고사 성적이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는 15점 이상이 높아야 했고, 피아노청음과 노래부르기를 통과해야 했다. 올림픽이 있었던 1998년 국악고등학교 입학은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입학 후 전공 악기 선택을 하게 되는데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작은 피리보다는 가로로 비켜 부는 커다란 대금이 근사해 보였다. 대금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선배들의 궁중음악부터 민간의 산조음악까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악들은 클래식이나 가요와는 다른 묘한 매력적인 음악으로 청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악학의 길을 걷다

전통음악의 숲에서 전문적인 대금 연주자로 국립국악원이나 KBS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가는 것보다 대학은 국악이론을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전통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연주 한번 하는 것 보다 더욱 가치롭게 생각되자 뒤쳐진 학과성적을 올리기 위해 몇 달을 학교에서 기숙하며 공부하였다.  당시 국악고등학교 이론전공은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늦게 이론전공을 시작한 만큼 용의 꼬리가 되기보단 용의 머리가 되어 보고자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수석 입학하였다.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첫 2박3일간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국악과만이 아닌 피아노과, 관현악과, 성악과, 작곡과 등 서양음악 친구들과의 만남은 대학생활을 더욱 재미있게 해 주었다.  음대신문사 기자, 매학기 음대 농촌봉사활동 등을 거쳐 음대학생회 활동은 이 시대 청년의 사회적 역할과 책무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바탕과 터전이 되었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국악학의 세계를 열어준 권오성 교수님은 국악만이 아닌 서양음악학, 인류학, 종교학, 민속학, 언어학 등으로 사고를 넓고 깊게 해 주었다.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진학 후 전국 국악과 대학원연합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 있으면서 각 대학교를 돌아가며 주제를 선정하여 작은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제자는 스승이 가는 길을 뒤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은사이신 권오성 교수님은 중국, 일본, 몽골,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의 음악의 학문적 교류에 이바지하신 분이다. 교수님의 해외 출장이나 세미나, 뒷풀이 자리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가와 학자들과의 만남은 국제음악교류의 필요성과 안목을 키우게 되었다.

음악교과서에 30% 국악과 국악대중가요를 넣다

1994년 교학사 음악편집 담당으로 입사하였다.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중학교 음악교과서를 새롭게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다. 국악 이론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변되는 시대적 감각에 맡는 신선한 국악을 교과서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교과서에 국악과 양악의 비율은 10:90 정도였는데 국악비율을 30%까지 끌어 올렸다. 국악대중가요로 인기를 얻고 있던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을 작곡자 허락을 직접 받고 국악관련 사진들로 세련된 사진들로 모두 교체하였다. 음악교과서의 혁신이라 할 정도로 바꾸었는데 당시 교과서 저자 중 양악 교수분이 최종본을 보고 왜이리 국악이 많냐며 자기는 승인 못하겠다고 교과서를 바닥에 내팽겨쳐 버렸다. 그 분이 돌아가자마 마자 담당 과장님께 사직서를 내고 화장실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국악을 대하는 우리 사회였구나 생각을 하니 모든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인 것이다. 그때 다짐하였던 것이 앞으로 국악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한 일들을 해야 겠구나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학예연구직으로 공무원으로 발을 딛다

1997년 9월 국가공무원 특채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었다. 21년 동안 국립민속악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 국악진흥과, 장악과, 국립부산국악원 등 공연, 연구, 진흥 등의 국악의 전반적인 일을 맡았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팀에서의 근무는 국립국악원만이 아닌 국악계와 문화예술계 전반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만들어낸 국악정책과 예산은 지금도 유효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문화예술정책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3D 입체영상 ‘만파식적’ 제작

국악박물관 운영을 맡고 있던 2003년에 신라 만파식적 설화를 소재로 한 3D 입체 영상을 만들었다. 국악박물관을 찾아오는 어린아이들에게 국악을 쉽고 재미있게 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신규 사업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립국악원내 여러 신규 사업에서 우선순위를 받아야 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예산 통과를 해야 하고, 기획재정부에서 최종 승인을 받아야 했다.겨우 기획재정부까지 예산이 올라가자 틈을 내서 음료를 사들고 기획재정부 예산 담당을 10번 이상 찾아 갔다. 국악원 예산 설명 차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복도에서 기다리면서 국립민속박물관장님, 국립국어연구원장님 등이 예산 확보를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기관장의 역할이 저런 거구나 하는 간접 교육을 실감나게 받았다.  예산 담당자도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정성에 감복하였던지 자투리 예산 1억8천만원을 받아 3D 입체영상 ‘만파식적’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3D입체영상을 만든 것을 보고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등에서도 3D 입체영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고궁과 고택에서 상설국악공연을 열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바다이야기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을 때 였다. 이때 문화체육관광부의 대국민 분위기와 인식을 바꾸기 위한 프로젝트를 마련하였다. 고종이 100여년전 주한외교사절들과 연회를 베풀었던 덕수궁 정관헌에서 주한 외국대사와 부인들을 위한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주한 외교사절을 오기 위한 유인책이 필요하였다. 그때 들었던 것이 외국대사와 부인들에게 맞춤 한복을 선물해 주면 모두들 오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실행을 하였는데 대박이 되었다.

독일, 일본 등 40개국 60명의 주한 외교사절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우리의 전통음악과 궁중무용감상과 사물놀이 체험, 전통차와 다과를 즐기고 마지막 순서로 덕수궁 정전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당일 저녁 9시 뉴스에 연일 바다이야기 대신 문화행사가 메인뉴스로 나온 것이다.  이에 힘입어 2008년부터는 덕수궁은 물론 창덕궁 연경당에서 상설국악공연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궁에서 행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사회분위기였다. 문화재청에서도 1회성 행사는 모르겠지만 상설공연에는 난색을 표하였다. 그래서 고궁활용심의위원회에 참석하여 직접 PT를 하며 설득 노력 끝에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고궁공연으로 모든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와 4시에 창덕궁 깊은 곳에 위치한 연경당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최고 감동의 공연 무대로 소문이 났다. 한 영국 회사 임원은 서울에 출장을 수십번 왔지만 갈 곳이 없었는데 대낮에 이렇게 멋진 공연을 본건 본인 인생에서 생애 최고였다고 찬사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고궁공연은 지금은 문화재청에서 ‘고궁달빛기행’ 사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궁공연의 성공에 이어 지역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으로 이어졌다. 예전 조선조 선비들이 풍류음악을 즐겼던 것처럼 고택에서 음악과 무용을 즐기는 것이다. 이에 각 지자체와 협력해서 전국의 고택을 선정하여 음악회를 열었는데 주5일제와 맞물려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1894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국악기를 국내 전시를 하다

동아일보 9월27일자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때 전시되었던 국악기가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파리악기박물관의 필리프 브뤼귀에르씨가 가야금통을 들고 찍은 사진도 포함되었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운영을 맡고 있던 당시에 다음에 언젠가는 프랑스에 있는 국악기들을 가져와야 겠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2011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 의궤 297권이 돌아와 국가적 이슈가 되었다. 이때 프랑스의 의궤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파리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국악기를 가져오면 또 다른 관심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하지 않고 무작정 파리 음악박물관으로 달려가 동아일보 사진에서 보았던 필리프브뤼귀에르씨를 만났다. 국악기 13점을 한국으로 가져가 전시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막상 승낙을 받고 보니 예산이 문제었다. 당해연도 예산은 작년에 기획재정부를 통과해 확보해야 하는데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다 보니 예산은 전무했다. 일은 저질렀고 포기하면 국제적 신뢰도가 무너지고 해서 협찬을 받으러 뛰어 다녔다. 좋은 일에는 다 길이 있다는 것을 몸소 실감하였다. 아시아나항공에서 화물운송을 협찬해 주었고, 우리은행, 프로비스타호텔, 고흥곤국악기등에서 협찬금을 내준 것이다.

공무원이 일을 만들어 땀을 흘려가며 뛰어다는 것을 보고 프로비스타호텔 회장님이 주의깊게 보고 계시다 후에 본인이 설립한 정효국악문화재단에 대표이사를 맡게 해 주었다.  의도했던 바와 같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출품 국악기의 국내전시는 모든 언론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YTN에서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악기 환영식을 실시간으로 생중계 방송을 해주었다.  2012년 파리만국박람회 전시 성공은 2013년에 1894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던 국악기의 국내전시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 예산 확보는 수월하게 이루어졌는데 신세계에서 작년 전시를 보고 매년 2억원을 협찬해 주기로 한 것이다.

공무원 생활의 정점, 국립예술단원 15명을 증원하다

2018년 10월 국립부산국악원 장악과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가장 큰 상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 전 직원이 매년 투표하여 직급별로 바람직한 관리자상을 선정 수여하는데 2019년에 바람직한 관리자상을 수상한 것이다.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심각한 현안이 있었는데 계약직 단원 약 30여명이 2년 경과되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내가 있을 때 위반한 것이 아니니 그냥 시간끌기 하다 서울로 발령받아 가는 것 하나와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 어린 단원들을 보고 결심하였다.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로. 물론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절대적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단원은 공무원연금혜택이 있기 때문에 기획재정부에서는 공무원 하나로 보아 절대로 증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A안, B안등을 마련해 우선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에게 상담을 하여 법적 검토를 끝내고 실행에 들어갔다. 기획재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있는 세종시를 부산에서 하루가 멀다 찾아가고 기획재정부 담당자 카톡으로 매일 같이 메시지를 남겼다. 부산의 오늘 날씨가 어떻고, 재미있는 콩트도 보내고 스토커처럼 매달렸다. 그리고 해당되는 단원들을 앞세워 기획재정부로 찾아가 눈물로 절박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2018년 연말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카톡이 왔다. 국립부산국악원 단원 15명 증원하기로 했다는 문자였다. 그대로 심장은 멈추었고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정말 세상은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구나 라는 인생의 진리를 새삼 알게 되었다.

공무원에서 문화예술 현장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열다

2019년 이른바 강사법이 통과되자 출강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에서 겸임교수는 9시간 이상 맡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공무원규정상 4시간 이상 외부출강은 금지되어 오랜 고민의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그렇다고 하면 21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사회경험 폭을 넓히고 공무원으로서 못하였던 것을 실행하는 시점이라 생각되었다.

2019년 4월30일자로 명예퇴직하고 5월1일자로 민간 최초 국악문화재단인 정효국악문화재단 대표 이사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침체 위기의 정효국악문화재단이 지금은 여러 기획공연으로 인지도를 올리고 지금은 가장 핫한 문화재단으로 발돋움되었다. 2020년부터는 동아국악콩루르 장소로 활용되는 등 여러 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국악 민간문화재단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할 것이다.

2학기부터는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와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로 공연기획론, 홍보마케팅론, 국악학연구방법론, 국악사특강, 국악문헌특강 등 여러 강의를 맡고 있다. 국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사회경험을 쌓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공연문화예술정책 마련 및 대안 제시를 위한 사단법인을 2019년 7월에 설립하였다.

국악은 물론 서양의 클래식까지 한국의 공연문화 발전을 위해 (사)공연전통예술미래연구원을 설립한 것이다. 세계 한민족 예술가들의 네트워킹을 위한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추진하고 있으며 향후 전 세계 한민족 공연예술가들의 거점이 될 한민족공연예술센터 추진을 하고 있다. 또한,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정책이 변함으로써 체육이 활성화 되었듯이 ‘엘리트 음악에서 생활음악으로’ 라는 정책적 변화와 실행사업으로 대한민국생활음악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음악의 강국인 우리나라에 아직 국립음악박물관이 없어 앞으로 국립음악박물관 건립 추진이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여러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2020년 부터 문화재청 국가무형문화재전문위원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전문위원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국제교류자문위원, 서울시남산국악당 예술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루 5시간 자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문화예술현장을 활기차게 누비고 있다. 21년간의 문화예술행정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문화브랜드 상승과 온 국민에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문화예술정책 개발 및 활용, 그리고 지역의 균형적 문화발전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세계한민족공연예술센터 거점화를 위해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열다

세계에는 700만명의 우리 동포들이 있다. 그중에는 19세기 조선이 힘이 없어 이주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가 있으며 고국을 떠난 우리 민족은 고려인, 조선족, 제일교포 등으로 불리 우며 100년이 훨씬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고 있다. 우리말은 못해도 우리 춤, 우리노래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 예술가들을 초청행사인 ‘세계 한민족 공연예술축제’를 2019년부터 실시해 오고 있다.

매년 광복절을 전후하여 국립국악원 우면당, 남산국악당, 정효아트센터에서 기념식과 초청공연, 축하공연, 강습을 3박4일 동안 개최하였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하여 8월7일부터 9일까지 2박 3일동안 국내 거주 재외동포 예술가들과 국내 명인 명창 등이 무대에 오른다.  세계한민족공연예술축제를 통해 앞으로 전 세계 한민족공연예술센터를 거점화하여 한민족공연예술가의 커뮤니티를 형성할 계획이다.

지금은 전통공연예술에 국한하고 있지만 점차적으로 서양음악을 하는 해외 한민족 공연예술가로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며 전세계 태권도 도장을 통해 태권도 보급이 세계화 되었듯이 세계한민족공연예술센터를 통해 국악과 클래식 등 우리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다.

 

 

주재근 대표 약력

-전)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현)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현)한양대학교 겸임교수

-현)사단법인 공연전통예술미래연구소 이사장

-현)서울시 무형문화재전문위원

-현)정효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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